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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센스 1달 수익과 방문자 수 평균

안녕하세요! 특별히 수익을 벌겠다는 욕심을 가진것은 아니지만 관심이 생겨서 시작했던 블로그였고 겸사겸사 승인이 되어 달게 된 애드센스에 관해서 글을 씁니다 ㅎㅎ 애드센스 승인도 우여곡절이 꽤 있었는데 반년정도(?) 방치 해뒀었던 블로그생활에도 신기하게도 매달 커피값정도는 나왔던 블로그였기에 저의 통계를 글로 써봅니다. 블로그를 업으로 하시는 분이나 엄청난 수익을 버시는 분들은 해당사항이 아니고 그저 하루에 0.1$라도 나왔으면 하시는 분들을 위한 글이니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 )

2017년 11월에 한번 140$ 정도를 받았고 지금 글을 쓰는 2018년 6월 1일에 다시 한번 통장으로 돈이 들어왔으니 대략 7개월 정도가 걸린셈입니다. 수익은 102$ 였구요 큰 돈은 아니지만 소소하게 재미로 쓰는 블로그에 작은 보상이라 기분은 좋네요 ㅎㅎ 게다가 유부라...용돈이 적어서...

대략 이렇습니다 ㅜㅜ 그래도 조금씩 들어오는게 어디에요 ㅜㅜ

여튼 이 글을 보게 된 분이라면 대략 보이시겠지만 제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이 평균 100~150사이인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고 두서없는 제멋대로의 블로그입니다. 그리고 하루 평균으로 계산했을때 제 블로그의 하루 수익은 대략 0.1$~0.4$정도? 정리하자면 100 = 0.1$정도로 생각을 하면 될까요... 그럼 1000명 방문에 1~2$정도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물론 수익은 조금 더 나올것 같습니다. 제 블로그가 1달 기준 약 7$정도의 수익이 나오는 상태이고, 하루에 100명이면 한달에 3000명. 그러면 1000명당 대략 2$... 상당히 낮춰 잡은 계산에 가깝기 때문에 더 나오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정도 되겠네요.

평균적으로 이정도 입니다 ㅎㅎ 엉망인 블로그라도 이정도 된다! 자신감을 갖자!? 라는 느낌으로 생각하시면 될듯 합니다. 특별히 이목을 끌고 인기가 많은 글이 없기 때문에 구독자에 한계가 분명하네요 ㅜㅜ 예전에 가볍게 올린 ps3 단종 글이 다음 메인에 갔을때 처럼 펌핑은 전혀 없죠 ㅎㅎ

ps3 포스팅 - [GAME/GAME 이야기] - 플레이스테이션3가 출하종료 예정
그리고 메인으로 갔던 글 - [티스토리와 애드센스] - 티스토리 구독자가 이틀간 폭등했던 이유와 애드센스

이 때 방문자수가 확 늘었던 기분좋은(?) 상황은 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제가 넣어둔 광고들 중 가장 잘 되고 있는것은 세가지 광고 입니다. 본문 상단에 하나, 본문 마지막, 그리고 맞춤형 광고. 그 외 나머지는 정말 적은 상황입니다 ㅜㅜ 하지만 무리하게 더 많은 광고를 넣지 않고 나중에 엄청 긴 글을 쓰게 될 경우에 본문 중간에 하나정도는 넣어볼 생각도 있네요. 맞춤형 광고는 어느날 갑자기 애드센스에서 사용가능하다는 글이 뜨면서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달고 싶었는데 역시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는군요. 페이지 회전도 겸해주는 것 같구요. (그래봤자 입니다만...)

누군가에게 배워가면서 블로그를 하는것도 아니고 엄청난 수익을 바라며 하는 것도 아닌관계로 이정도 정보가 일단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애드센스 가입부터 헤매고 있고 블로그 진행중에도 수익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분도 많을 터. 저같은 소시민의 블로그를 보시고 티끌이나마 참고를 하신다면 저도 흐믓(?) 할 것 같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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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에 대한 몰랐던 사실 TOP 10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가장 상징적인   하나였습니다. 소련과 동독은 그것을 Faschistischer Schutzwall ( "Anti-fascist Protective Wall")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서쪽 간첩이 베를린으로 몰래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벽이 필요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주민들을 위한 저렴하고 보조적인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여행하는 것을 중단될 것입니다.

서독에서는 베를린 시민들이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기위한 소련의 시도로 벽이 승격되었습니다. 처음에 미국은 소련이 서독에 대한 전쟁을 시작한 걸음이라고 생각했고 F. 케네디 대통령은 베를린에 많은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케네디는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벽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벽이 "전쟁보다 훨씬 낫다" 말했습니다.


10 
벽은 동서독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동독과 서독을 분리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오해입니다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동서독을 갈라놓은 것은 알려지지 않은 독일 내부 국경입니다. 베를린 장벽은 베를린을 베를린과 동독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했습니다. , 당신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를린은 동독내부에 있었습니다.

베를린이 동독에서 어떻게 끝났는지 이해하려면 독일이 어떻게 분할 되었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2 세계 대전 종전에 독일은 4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습니다 구역은 미국, 영국, 소련 또는 프랑스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소련 조정 지역에 속한 베를린을 4 부문으로 나누었는데, 이들은 또한 연합국들 사이에서 공유되었습니다. 소련과의 불일치로 인해 나중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소련에 동독과 베를린을 남겨두고 서독과 베를린을 형성하기 위해 지대와 부문을 합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시 독일 내부 국경은 베를린 장벽보다 정교했습니다. 길이가 1,300 킬로미터 (800 마일) 이상으로 154 킬로미터 길이 (96 마일) 베를린 장벽 길이의 8 배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베를린 장벽의 단지 43 킬로미터 (27 마일)만이 베를린에서 베를린을 분리했습니다. 대다수의 벽은 베를린의 대부분을 동독의 나머지 지역과 분리했습니다.

9 
사실은 두개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달리 베를린 장벽은 개의 벽이 아니라 개의 평행한 벽이 100 미터 (328 피트)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베를린 장벽으로 생각하는 것은 베를린에 가장 가깝습니다. 1961 8 13 번째 벽에서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1 후에 번째 벽이 뒤를 이었습니다. 2개의 사이에서 "죽음의 "이라고 이름이 지어진 사람이 없는 땅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길목에는 아무도 들어갈 없었고 베를린으로 도망가려는 침입자는 총에 맞을 각오를 했습니다. 죽음의 길목 안의 건물들은 파괴되었습니다. 전체 지역은 평평했고 모든 탈추자들의 발자국을 드러내기 위해 자갈로 채워졌습니다. 땅에는 밤에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투광 조명이 붙어 있습니다.


8 
두개의 사이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죽음의 길목에서 동독과 소비에트 당국은 아이러니하게 이름지어진 화해라는 교회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파괴했다. 그러나 교회는 제한 구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흥미 롭습니다.

베를린을 분할 , 교회 주위의 지역은 프랑스와 소련 사이의 국경에서 바로 떨어졌습니다. 교회 자체는 소비에트 부문에 있었고 신자들은 프랑스 부문에 살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 지자 신자들은 교회와 분리되었습니다. 번째 장벽이 추가 무렵에, 소비에트 부문에 살고있는 소수의 신자들은 이상 교회를 사용할 없었습니다.

베를린에서 버려진 교회는 소련에 의해 베를린 시민들과 동독인들에 대한 억압의 상징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교회는 순찰을 통해 주변을 돌아 다닐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동독 경비병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동독 일부 교회는 정부의 반대자들을 위한 망명장소가 되어 정부는 메시지를 보내야 했습니다. 모든 문제들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결정을 최고조로 만들었습니다.

1985
1 22일에 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베를린은 "안보, 질서 청결을 증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철거는 단지 복잡한 이슈를 야기시켰고 교회를 유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철거 사진이 세계에 퍼지면서 동독인들의 억압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7 
장벽이 지하철로 모든 길을 확장하는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지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베를린 지하철 아래까지 느껴졌습니다. 앞에서는 베를린 전체가 같은 지하철을 사용했습니다. 뒤에서 양측은 양쪽 옆에있는 역과 철로를 소지했습니다. 베를린의 지점 사이를 여행하는 열차가 때때로 베를린 밑의 철로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양측 시민들의 도피와 혼란을 막기 위해 베를린 시민들이 운영하는 회선 사용을 중단했습니다. 역은 봉인되었고 철로로 둘러싸여 베를린 열차 탑승에서 지하철로 진입한 베를린 시민들을 막기 위해 철로와 경보 장치가 설치되었습니다.

베를린 열차는 역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멈추었 유일한 베를린 역은 프리드리히 스트라 (Friedrichstrabe) 역이었고 베를린 시민이 베를린으로 여행하기위한 곳이었습니다. 베를린은 "열차가 멈추지 않는 "이라고 표시된 베를린 역을 인정했지만, 반면에 동독은 그것을 지도에서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6  작은 '베를린 장벽'으로 마을을 나눴습니다

독일의 분단 이후 독일의 바바리아 (Bavaria) 튀링겐 (Thuringia) 모들라트 (Modlareuth) 마을을 흐르는 탄바흐 (Tannbach) 강은 미국과 소비에트 통제 지역의 경계로 사용 되었습니다독일 내부 국경이 만들어 졌을그것은 마을을 가로질러 두나라 사이로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주민들이 자유로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의 가족을 방문   있었기 때문에  결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52년에 세워진 나무 울타리가  자유를 부분적으로 제한했습니다그런 다음, 1966 년에울타리가 3 미터 높이 (10 피트) 시멘트 석판으로 대체되었을  영구적으로 제한되었습니다 - 베를린을 분리하는  사용  것과 동일한 타입.

그 벽은 마을사람들이 두나라 사이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베를린의 이웃과 가족들의 분리를 상기시키는 베를린 장벽 (Berlin Wall)과 같아 서쪽에서 이 마을을 "리틀 베를린 (Little Berlin)"이라고 렸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처지가 벽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동독 당국은 벽에 침입을 시도하기 위해 마을로 몰래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후에 전기 펜스를 추가했습니다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기가 어려워 짐에 따라 이것은  악몽이 되었습니다.

벽의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서있고, 몇개의 감시탑과 초소로 완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마을은 여전히 두개의 연방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습니.

5 장벽의 가장 유명한 그라피티 키스하는 2 명의 대통령 그라피티 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베를린 장벽은 평행   개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가장 가까운 쪽은 건설  즉시 낙서 자석(graffiti magnet)이 되었습니다그러나  베를린에서 가장 가까운 쪽은 동독인들이 가까이에서 모험을   없기 때문에 공백으로 남겨졌습니.

1989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몇몇 작가들은  베를린 장벽에 모여 낙서(grafiti) 만들었습니다가장 유명한 작품  하나는 소련의  지도자  레오 니드 브레즈네프 (Leonid Brezhnev)  동독 본부의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깊은 키스를  장면이다낙서는 죽음의 키스 (Kiss of Death)라고 불리며 소비에트 유니온 (Soviet Union) 드미트리 브루  (Dmitri Vrubel) 그렸습니그는 그것을 자막에 넣었다 : "하나님, 치명적인 사랑의 일에서 살아 남도록 도와주세요."

 이미지는 동독 창설 30 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도자가 키스  1979년에 찍은 사진을 재현  것입니다 "형제 키스" 실제로 공산당 국가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통적이었습니다브레즈네프 (Brezhnev) 키스  호네커 (Honecker) 대해 말한 농담이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쓰레기. . . 하지만 좋은 키스꾼!"

4 6,000마리 이상의 감시견이 죽음의 길을 순찰했습니다.

"죽음의 길목"- 베를린 장벽의 평행    사이의 공간 -은 타당한 이유로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탈출도 막기 위해" 도그"라고 불리는 수천 마리의 사나운 동물들을 포함한 정교한 조치로 단단히 보호되었다.

독일산 셰퍼드는 선택된 개이지만, 로트 와일러, 그레이트 다네, 그리폰 같은 다른 품종들도 사용되었습니다. 그곳에 얼마나 많은 개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 일부 계정은 6,000마리 언급하는 반면, 다른 계정은 10,000마리까지 올라갑니다.

개들은 죽음의 길목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 다닐  없었습니다대신 동물은 길이 5 미터 (16 피트) 사슬로 묶여 어떤 방향으로도 달릴 수 있었습니다체인은 개가 벽에 평행하게 달리는 것을 허용하는 100m 길이의 케이블 (330ft) 연결되었습니다그렇게하면 개들은 경비병이 도착할 때까지 탈출구 앞에 머물러 탈출구를 막게 됩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개들은 동서독에서 입양되기를 기도했습니다그러나 서독 사람들은 이미 언론이 동물을 위험한 짐승으로 길들여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개를 입양하는 것에 회의적이었습니다.

독일의 동물 보호 연합 (NATO) 입양을 지지했지만베를린 장벽의 기념으로 개를 데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우려했습니다동물도 안락사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동독의 표준방법 감전사로 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었기 때문에 안락사가 필요한 경우 안락사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3 마거릿 대처와 프랑소와 미테랑은 장벽이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프랑소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 파괴와 독일 통일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대처총리 둘 중에서 더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그녀는 통일에 관한 한창 무르익었을때 "우리는 독일인을   이기고 지금은 그들이 돌아왔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처총리는  과정을 멈추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심지어 영국 정부를 그녀의 편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통일을 멈출  없다는 것을 깨달을 그녀는 5 후에 통일이 되도록 제안했습니다.

미테랑은 "나쁜 독일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에 대해 우려했습니다그는 또한 통일 독일이 아돌프 히틀러보다  유럽에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미테랑은 야당이 통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 통일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그러나 그는 대처를 지원했습니다미테랑 (Mitterand) 유럽 연합 (EU)처럼 유럽 연 (EU)기구에 가입하면 독일을 통제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 최근에 발견  벽의 잊혀진 부분.

베를린 장벽은 1989년에 철거되었습니다의도적으로 남아있는 나머지 부분은 독일의 분열의 유물입니다그러나 벽의  부분은 2018년에 재발견  때까지 잊혀졌습니다. Schonholz (베를린 교외 지역) 80 미터 (262 피트) 벽이 남아있던 것은 Christian Bormann 역사가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Bormann 2018 1 22일에 게시  블로그 글에서 1999년에 실제로 벽을 발견했지만 비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는 벽이 심각한 파손 상태에 빠져 붕괴   있다는 우려를 통해 비밀을 드러냈습니다철도 트랙과 묘지 사이의 수풀이 많은 지역에 있는 벽의 숨겨진 위치가 잊혀진 주된 이유입니다.

1 아직도 독일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독일과 베를린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벽의 건설  이상이었습니다그것은 이데올로기 였고  효과는 여전히 느껴질  있습니다하나는 서독이 자본주의였고 동독은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것만이 각국의 정치와 그들이 어떻게 운영되고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2 우주비행사 Andre Kuipers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촬영 편집되지 않은 사진으로 베를린 서부를 구별   있었습니다이전에는 동쪽 베를린의 노란색 조명과  베를린을 녹색 번개로 보여주었습니다뚜렷한 차이는 양국에서 사용 가로등 타입의 차이였습니다서독의 조명은 동부의 조명보다 환경 친화적입니다.

오늘날 동부 독일은 서부 독일보다 평균 임금이 낮습니다벽이 떨어지자 동독의 많은 공장들이 서부 지역의 공장과 경쟁   없었기 때문에 폐쇄되었습니다이것은 서구 독일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재능있는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임금을 인상 했습니다.

 결과 동부 독일 출신의 구직자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독으로 이주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이로 인해 독일 동부의 실업률이 줄어들었지만 지식 유출이 발생하여 폴란드에 있는 기업들과 근로자들을 위한 체코공화국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긍정적인 측면은 동독이 서독보다 쓰레기를 배출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독 사람들이 경제적이지 않았던 서독 사람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만 샀던 공산주의 시절의 보상입니. 동독은 서부 독일보다 보육 시설이 낫습니다. 동독 어머니들은 일을 많이 하고 서독 어머니들은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

동부 독일인들도 농장이  넓고 독감 예방 접종을 맞을 가능성이 더 높고 캠프의 텐트 안에서 잠을 자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대조적으로 서부 독일인들은 트레일러에서 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이것은 서독 사람들이  많은 가처분 소득을 가졌 동독 사람들이  수 없는 사치을 할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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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있는 꽃 맹독성 식물 협죽도 (유도화)

집에 선물로 받았던 꽃이 협죽도라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되어 황급히 처리했습니다. 꽃을 주신 분도 몰랐다는군요. 꽃의 색과 모양이 화려하고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협죽도입니다. 유도화 또는 유선화라고도 불리는 꽃입니다. 하지만 이 꽃이 치명적인 독이 있는 위험한 식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협죽도는 열대·아열대 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나무이며 원산지는 인도입니다. 한국에서는 남쪽 지방에 많이 자랐었지만,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오염에 상당히 강하고 길이가 상당히 길게 자라며 어디서든 잘 자라 키우기 편하고 공기정화 능력도 탁월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관상용으로 많이들 키웠었다고 합니다. 저도 모를 때는 정말 꽃이 아름답고 줄기와 잎은 대나무와 같이 매끈해서 매력적인 꽃이었으니까요 ㅎㅎ

지금 이 글을 쓰는 5월. 협죽도가 꽃을 피웠습니다. 사진을 보면 아시겠지만, 연분홍색의 꽃 화려하고 예쁘지만 얼마나 위험한 꽃인지 인제야 알게 되었죠. 작년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예쁜 꽃을 감상하며 한 해를 넘겼습니다. 위험한 식물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협죽도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검색을 해보니 JTBC 뉴스에서 협죽도가 위험하지만, 조경수로 20년 동안 키워져 왔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JTBC기사는 이쪽 :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979347

뉴스에서는 아주 미량이라도 치사율이 높기 때문에 과거에는 독화살 또는 사약의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협죽도의 독에 중독이 되면 복통, 어지러움, 구토 등을 일으키고 심한 경우에는 심장이 수축하여 사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산가리의 6000배나 되는 라신이라는 물질이 잎과 줄기 등 나무 전체 들어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라신이라는 물질은 협죽도에는 없고 리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 글에서는 언론의 보도와는 다르게 6000배의 독성의 라신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일단 독이 있는 꽃은 맞다고 하니 신생아가 있는 우리 집은 황급히 꽃을 처분하였습니다.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말이죠.

예전에는 조경수로 널리 쓰이던 협죽도. 지금은 벌목대상이 된 비운의(?) 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꽃만이 아닌 다른 많은 예쁜 꽃들이 겉과 다르게 독성을 품고 있을 수 있으니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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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50일 사진 체험기

체험기라고 적었지만 거창한 글은 아니고... 조리원에 있을때 신생아사진에서 부터 50일 사진까지 경험담을 공유하고자 글을 씁니다 ㅎㅎ
사진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스튜디오와 산후조리원의 정보를 알수 있기 때문이죠 : )


대신 발사진 ㅋ

보통 베이비 스튜디오에서는 영업(?)활동으로 베이비 페어의 부스에서 예비 엄마들에게 만삭사진을 포함한 패키지사진을 제안하고 판매를 합니다. 하지만 보통 베이비 페어는 스튜디오 업체의 갯수가 제한이 되어있어 많은 스튜디오들이 참여를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스튜디오는 조리원으로 패키지상품 판매를 하게 됩니다. 나쁜것이 아닌 판매를 위한 전략의 방법이니 상부상조하고 아기 엄마는 편하게 스튜디오와 계약을 할수 있으니 나쁘지 않죠. 단 조리원에서 딜을 한 스튜디오는 보통 한곳이니 아기 엄마에겐 선택의 권한은 없습니다. 사진을 참여하거나 안하거나 둘중 하나죠.
저희는 조리원에서 신생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보통 조리원에 있을때 한번 아기와 같이 스튜디오에 방문해서 신생아 사진을 찍게 해주지만 힘들어서(귀찮아서?) 스튜디오를 가지 않고 조리원 내부의 카페트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ㅎㅎ 그리고 다음번 50일 사진을 찍을때 이 신생아 사진과 함께 미니앨범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저흰 그렇게 신생아 촬영을 마치고 50일째가 되어 스튜디오에 처음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참고로 스튜디오에 dslr이나 미러리스와 같은 좋은(?)카메라를 가져가면 보통 촬영을 금지 시킵니다. 카메라가 많이 좋아져서 부족한 예쁜 장소와 소품만 있으면 괜찮은 사진들이 나올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밖에서 사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일수도 있기 때문이겠죠. 스튜디오마다 다르겠지만 큰(?) 카메라는 보통 금지. 그대신 스마트폰으로 찍을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스튜디오는 많이 있습니다.

내부에서 스튜디오촬영을 하는 것은 뭐 다들 알고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그냥 사진사 분들이 알아서 보조와 함께 아기 옷과 소품을 바꿔가며 예쁘게 많은 사진을 찍습니다.

촬영이 끝나면 이 사진들을 가지고 동영상을 만들어줍니다. 영상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만들어져있는 영상틀에 사진만 바꿔 끼우는거라 많은 품이 들지는 않죠. 여튼... 스튜디오에서 영상작업을 하는 동안 패키지상품관련 구매 영업에 들어갑니다.

대략 전체는 이렇게 되죠.
만삭, 신생아, 50일까지 찍은 사진으로 앨범제작은 무료. (이 부분은 보통 조리원과 계약이 되어있는 부분이니) 대신 앨범자체가 사진을 몇장 넣을수 없으므로 앨범제작에 들어가지않은 사진은 주지않는다. 사진을 원하면 원본사진 값 00원을 내면 파일로 주겠다. 아니면 이것과 앞으로 있을 100일, 돌, 양가 가족사진 등을 패키지로 스튜디오에서 진행을 하면 원본파일 포함해서 00원에 해주겠다. 그리고 추가로 액자와 시계 등 부가적인 상품도 함께 해드린다.

예전 베이비스튜디오를 했던 형님 왈. 돈으로 따진다면 자석액자와 작은 액자 여러개는 다 필요 없다고 하고 큰 액자를 더 얻거나 다른 상품을 추가하거나 하는식이 좋다고 합니다. 왜냐면 큰 액자는 원가가 다른 것에 비해 센편이기 때문이라는 군요. 원가를 떠나 이런부분은 가족의 취향과 이용목적에 따라 다를테니 참고만 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촬영한 사진으로 만든 영상을 보여주니 예상대로 아내는 갖고 싶어하더군요. 나도 만들수 있는데!!!! (단지 귀찮아서 안합니다 집에서 까지 비슷한 일을 하고싶진 않...) 여튼 아내는 영상을 받고 싶어했고 앨범에 쓰이지 않는 사진들이 아까워서 결국 50일 사진 원본을 10만원 초중반 가격에 구매를 합니다. 결과적으로 고생해서 찍은 사진을 버리게 되는 사태를 만드는 것이 조리원 무료 사진 상품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인생에 한번' 이라는 타이틀의 장사는 이런 마음을 부추기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죠. 패키지는 내가 소품사서 가볍게 찍자고 설득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찍으면 당연히 조명도 좋고 배경도 좋지만 내가 직접 찍고 액자와 앨범도 직접 만들고 싶기 때문이죠. 사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50일 원본만 구매를 한 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예전 결혼식때 셀프 포토테이블을 만들었으니 이번 아기 앨범도 직접 함께 만들기로 결정을 짓고 말이죠. 다음에 100일 사진을 찍으면 포스팅을 해보겠습니다. 흥해도 포스팅. 망해도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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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아 반사 반응과 반사 종류 그리고 가벼운 경험담

60일째로 접어드는 육아생활에 개인적으로 많이 걱정되었던 부분 중 하나는 반사 반응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밤잠 제외 ㅜㅜ  특별히 이상이 없는지 엄마 아빠라면 당연히 궁금하죠 ㅎㅎ 먼가 '우리 아기가 혹시 문제가 있으면 어떻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저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저는 안 그럴줄 알았는데...막상 내 자식이다 보니 ㅋㅋ)


출처 : 내 자식 ㅋㅋ

50일이 조금 넘어가면서 소리에 반응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전에는 좌측 우측 딸랑이를 흔들며 소리를 내도 제대로 듣고 있는지 다른 문제가 없는지 구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반응이 없었거든요... 결국 그런 불안감에 다시금 병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론 조금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도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희 아기의 경우 대략 50일쯤부터 눈동자와 머리 방향을 틀어 가면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신생아 반사 반응에는 모로 반사, 먹이 찾기 반사, 쥐기 반사, 걸음마 반사, 일어나기 반사 등이 있습니다. 여러 책과 인터넷 글을 찾아보니 조금씩 명칭이 다를 뿐 전반적인 내용은 같았습니다. 

모로 반사

아기를 건드렸을 경우 또는 아기가 놀랐을 때 팔과 다리를 들었다가 가슴 쪽으로 모으거나 허우적거리는 반사 작용입니다. 목을 길게 빼는 행동도 포함이 됩니다. 이 반사가 중요한 이유는 만약 반사가 없거나 한쪽에서만 나타날 경우 뇌성마비를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모로 반사는 대략 2~3개월 정도까지 지속됩니다.

먹이 찾기 반사

신생아실에서 빽빽 울고 있을 때 간호사가 손가락을 살짝 입술 주변을 터치하더니 바로 울음을 그쳤었죠. 첫 아기라 그 장면을 보고 엄청 신기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 아마 그 부분이 먹이 찾기 반사가 아니었나 싶네요. 손가락으로 입술을 자극하면 얼굴을 돌려 빠는 흉내를 내는 반사를 말합니다. 이 반사도 3개월 정도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쥐기 반사

익숙한 반사 반응입니다. 다른 글에는 파악 반사라고도 하네요. 손을 잡으면 꽉 쥐려는 반응입니다. 생각보다 힘이 세요 ㅎㅎ 목욕할 때마다 어딘가를 쥐려고 발버둥 치는 장면을 자주 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었습니다 ㅎㅎ

걸음마 반사

전 이 반사 반응을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걸음마 반사는 아기 겨드랑이를  가볍게 잡고 바닥에 발을 딛게 하면 아기가 걸을 것처럼 한쪽 다리를 들거나 앞으로 뺀다고 하는데요 저의 경우 (현재 60일) 바닥에 발이 닿으면 좌우로 벌리거나 무릎을 구부리려고 해서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ㅋ

일어나기 반사

아기의 손 또는 팔을 잡고 살짝 당기면서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면 아기는 반사적으로 힘을 꽉 주며 일어나려는 행동을 취합니다.

대략 이렇게 정리가 되는데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이 반사 행동들은 육아를 하면 거의 대부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행동들인 것 같습니다. 아기와 놀아줄 때 손을 잡고 살짝 들어주며 놀거나 마사지를 해준다고 발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밀어주면서 대부분 저런 반응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먹이 찾기는 뭐... 배고프면 제 팔을 물어뜯을(?) 정도로 빨려고 하니... 모를 수가없죠 ㅋㅋ 단 아기와 함께 생활을 하며 '어? 내가 이렇게 하는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라는 느낌이 들 때 이런 내용들을 찾아서 한 번씩 확인해 보는 정도가 맞을 것 같네요.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니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 걸음마 흉내를 아기가 내지 않아서 아기랑 놀 때 몇 번 더 해볼 예정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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